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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개

 

1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먼저

신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의 아버지로서의 모습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신가?

 

2부: 언약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버지적 권위

하나님의 아버지적 공급

하나님의 아버지적 훈련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충실함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의 중요성

 

제3부: 경건함 속에서 발전함으로써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경건함의 훈련의 필요성

경건함을 위한 훈련을 위한 실제적인 단계들

 

4부: 충실한 아버지로서의 머리 직분을 행사함(엡 5-6장)

사랑의 봉사로서의 아버지적 우두머리 역할

권위적 리더십으로서의 아버지적 지도력

훈련으로서의 아버지적 우두머리 직분

지시로서의 아버지적 지도력

 

결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아버지 역할

Kyle Claunch 지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아버지 역할

“아버지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징계와 훈계로 양육하라.”

– 사도 바울, 에베소서 6:4

소개

"나는 이제 당신들을 남편과 아내로 선언합니다." 

노련한 목사로서 저는 그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저는 단순히 목사로서 교회 회원에게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서 제 아들과 그 순간 제 며느리가 된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그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나에게 매우 개인적인 무언가가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머리와 함께 새로운 가정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순간까지 아들은 평생 동안 내 가족의 일원이었고, 집에서 내 우두머리 아래 있었고, 내 권위에 복종했습니다. 이제 그는 다른 가정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리라" 모세는 창세기 2:24에 이렇게 썼습니다. "떠나서 합하라"는 옛 속담은 그 구절의 오래된 번역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순간이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거운 기쁨. 이 사건의 심오함과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아버지로서의 세월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제 감정은 무거웠습니다. 저는 아들이 경건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집안을 충실히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제가 아버지로서 기울였던 모든 노력의 큰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과 관련된 날들에 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가장 큰 아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아버지였을까요? 나는 아들이 앞으로 거룩한 삶의 모범을 내 삶에서 찾을 수 있도록 경건함, 겸손함, 충실함, 순수함, 사랑을 본보기로 보였을까요?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데 있어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을까요? 

제 성찰은 후회라는 범주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제가 옳게 했다고 믿는 다른 것들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러한 성찰은 저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소망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저는 완벽한 아버지(또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공식을 따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완벽함의 공식, 즉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입니다. 제 최선의 노력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함의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느니라"(롬 3:23). 하지만 저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악을 지녔지만, 영광스럽고 완벽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요 3:1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 죄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는 죄의 용서와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가 율법의 행위, 즉 아버지로서의 수고를 포함하여(롬 3:28, 갈 2:16)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약화시키는 자기 혐오에서 나를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은 내가 충실한 아버지로서의 소명과 의무를 살아가도록 강요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의 수고를 포함하여 나의 구원의 일상적인 현실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빌 2:12-13). 

이 현장 안내서를 통해, 아버지가 되는 일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을 돌보시는 아버지적 보살핌의 본보기임을 여러분이 알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자녀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할 때 성령이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구원의 사랑에서 위로, 확신, 힘을 얻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1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먼저

신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의 아버지로서의 모습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본문에서 아버지로 불립니다. 이사야는 “OL주문,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사 64:8). 어떤 사람들이 좋은 인간 아버지의 도움 없이 삶을 살아가는 깨진 세상의 현실을 언급하면서, 다윗은 “거룩한 거처에 계신 하나님”이 “아버지 없는 자의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시 68:5).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9). 바울은 하나님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여”(롬 8:14-17; 갈 4:4-6).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부르셨던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막 14:46). 아빠 발음하기 쉬운 아람어 단어이며 영어 단어와 매우 유사합니다. 아빠, 그것은 아이의 언어 발달 초기에 배운 단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계시된 이름인 아버지로 부르는 것보다 더 친밀하고 기본적인 본능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것은 좋은 지상의 아버지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친밀함, 보살핌, 지시, 공급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 가정에 따르면, 아버지라는 개념은 인간 피조물에 대해 먼저 그리고 더 적절하게 참일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적절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언급하는 아버지를 이해해야 하는 방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성한 아버지됨과 인간의 아버지됨 사이의 유추가 실제로는 그 반대라고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에베소서 3장 14-15절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이름을 받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나이다”라고 말합니다. ESV 성경에서 “족속”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입니다. 파트리아, 이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ESV는 "모든 가족"이라는 문구가 "모든 아버지"로 번역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각주를 제공합니다. 이번에는 대체 번역으로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모든 아버지 하늘과 땅에 이름이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인간 아버지 사이의 어떤 대응 관계 때문에 자신을 아버지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비유, 반영으로서 인간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아버지됨은 신성한 아버지됨을 따라 배우고 본받아야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모든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유래되었다면, 참되고 영원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딴 사람들로서 충실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이름인 아버지의 중요성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신가?

성경이 아버지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거룩한 삼위일체의 첫 번째 인격은 아들인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과 관련하여 영원한 아버지이고, (2) 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피조물과 관련하여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두 가지 방법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

이 영원한 관계는 우리를 삼위일체의 신비의 핵심으로 바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긴장하거나 귀찮게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삼위일체의 영광스러운 교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한한 정신의 범위와 도달 범위를 넘어섭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이 처음부터 알 가치가 있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숙고하면서 "오, 하나님의 부와 지혜와 지식의 깊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은 헤아릴 수 없도다"(롬 11:33)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성경에서 "독생"이라는 단어는 사도 요한의 글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5번 사용되었습니다(요한복음 1:14, 1:18, 3:16, 3:18, 요한일서 4:9 - ESV는 이 구절에서 이 단어를 "오직"으로 번역했지만 NASB와 KJV는 더 정확한 번역인 "독생"을 제공함).아이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본성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인간의 아버지는 인간의 자녀를 낳습니다.유추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 아들을 낳습니다.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 즉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참으로 완전한 신이기 때문에, 신 아버지의 아버지됨에는 이전과 이후,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진실은 우리에게 아버지됨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신에게 참된 것이었으며, 세상과의 관계에 관계없이 그에게 참된 것임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는 지상의 아버지와 그들의 자녀와 매우 제한적인 면에서 유사합니다. 이 점에서 차이점은 훨씬 더 심오합니다. 인간 사이의 아버지-자녀 관계의 많은 특징은 단순히 하나님 안의 영원한 아버지-아들 관계와 관련이 없습니다. 권위와 복종, 공급과 필요, 징계와 죄, 교육과 학습과 같은 것들은 영원한 아버지-아들 관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현장 가이드의 초점은 실제로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께 적용되는 두 번째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삼위일체의 첫 번째 인격이 영원히 아버지라고 불리우기 때문입니다. 낳는다 아들을 삼일 하나님이라 부르시는 것은 그가 채택하다 그의 백성을 자신과 언약 관계에 있는 아들로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성령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마음에 구원을 적용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영구적으로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가 되었다. 갈라디아서 4:4-6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서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요 아들이면 하나님을 통하여 유업을 얻을 자니라

이러한 언약적 의미에서 신의 이름인 아버지가 인간의 부성과 가장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관련하여 언약의 머리로서 아버지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정확히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인간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과 관련하여 언약의 머리라는 위치로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습니다. 이 현장 가이드의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인간 아버지가 수행해야 할 핵심 역할과 책임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나님의 부성이 우리에게 계시되는 방식을 알아볼 것입니다.

토론 및 반성:

  1. 인간의 아버지 역할이 하나님의 아버지 역할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이 부분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켜 주었습니까?

2부: 언약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

에베소서 3:14-15의 패턴을 따라가며 - 모든 부성은 하나님의 부성에서 이름을 따옴 -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맺으신 언약적 관계가 인간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에게 맺는 관계와 비슷한 방식을 찾을 것입니다. 신성한 이름인 "아버지"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적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적어도 네 가지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우리 주님으로서의 그의 권위(요한2서 4절).
  2. 우리의 공급자로서의 그분의 돌보심(마태복음 26:25~34).
  3. 그분은 우리를 의로 교육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계하십니다(히 12:5-11).
  4. 그분은 많은 아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심으로써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실 분으로서의 신실하심을 갖고 계십니다(히브리서 2:10).

이 네 가지 진실을 각각 간략하게 살펴보고, 각 진실이 인간의 아버지 역할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적 권위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첫 구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하나님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존재는 필연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히 독립적입니다. 창조되지 않은 모든 것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이성적인 피조물(생각하는 마음과 자의식을 가짐)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와 완전한 순종을 빚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에 의해 그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고, 그들은 그의 자녀입니다. 이 언약 관계는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고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아름다운 복잡성을 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과 입양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의 근본적인 현실을 없애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한 교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매우 짧은 편지(요한2서)를 썼습니다. "택함받은 여인과 그녀의 자녀들"(1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칭찬하고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계속 전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 자녀들 중에 어떤 이들이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노라"(4절)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특별한 언약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 단순한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이니 곧 우리가 그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이니라"(6절).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사랑의 아버지적 권위를 행사하시는 것처럼, 인간 아버지들은 하나님에 의해 자녀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권위라는 개념 자체가 멸시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권위를 행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 권한이 있고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BE 권위. 권위에 대한 모든 이야기와 계명을 내리는 것은 현대인의 귀에 오만함과 억압의 냄새가 난다. 우리 시대의 만연한 반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은 사탄이 인간들 사이에 퍼뜨린 가장 성공적인 거짓말 중 하나이다. 우리가 성경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권위가 실제로 좋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회 질서에 계층적이고 권위적인 구조를 정하셨다. 인간의 삶과 사회 전체가 세상에서 번성하려면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 권위 구조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가정의 권위 구조이다.

성경은 첫째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권위(머리)와 복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엡 5:22-33). 여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엡 6:1-4).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인간 아버지는 자기 희생적이고 사랑하는 머리로서 아내에 대한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의 복지를 위해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권위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아버지 역할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적 공급

그의 유명한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군중에게 그들의 일상적인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급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시느니라. 너희는 저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왜 옷에 대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영광 가운데 있던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살아 있다가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를 더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방인들은 이런 모든 것을 구하되,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에게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을 위하여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괴로움으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25-34, 강조체 추가).

예수께서는 이러한 지시를 주시면서 일반적인 것에서 더 친밀한 것으로 추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을 일반적으로 돌보십니다. 새와 꽃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예수님의 모범은 시편 104:10-18을 연상시킵니다. 시편 기자는 나귀가 물을 마시고 새가 노래하는 골짜기의 시냇물(10-13절), 가축이 먹이를 먹는 들판의 풀(14절), 새가 둥지를 틀고 있는 땅의 나무(16-17절)에 대해 묵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러한 피조물을 돌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 작은 창조물을 돌보시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창조물 속의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돌보시는 그분은 당신과 내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분입니다.당신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십니다(26절)! 당신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아십니다(32절)!

같은 설교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공급과 지상의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주는 공급 사이의 비유를 끌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7:7-1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자마다 받고 찾는 자는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겠느냐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좋은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를 돌보아 준다는 것을 배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위한 그의 공급을 방해할 수 있는 제한이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일관된 공급은 자기 희생, 미루어진 즐거움, 근면, 인내의 습관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무리 많은 규율, 습관 형성, 근면이 아버지로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당신의 근면한 노력과 보살핌은 항상 당신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있는 그의 풍성함에 따라 당신의 모든 필요를 진정으로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빌립보서 2:19). 

하나님의 아버지적 훈련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징계하실 것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징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처벌적인 결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징계에는 처벌적인 결과가 수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징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처벌적. 단순히 처벌적인 결과와 징계적인 결과의 차이는 의도된 결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단순한 처벌의 의도된 결과는 보복입니다. 공정한 점수 정산입니다. 징계의 의도된 결과는 징계를 받는 사람의 지시입니다. 징계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의도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서 12장 5-1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진리를 상기시킵니다.

죄에 대한 싸움에서 당신은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로서 당신에게 하시는 권고를 잊었습니까?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가 책망해도 지치지 마십시오. 주께서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나니 그리고 그가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징계하십니다.” 

너희가 견뎌야 할 것은 징계를 위함이니라.하나님께서 너희를 아들로 대하시는도다.아버지가 징계하지 아니하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만일 너희가 징계를 받지 아니하면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로다.이 외에도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어서 우리를 징계하였고 우리는 그들을 공경하였느니라.하물며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그들은 잠깐 자기들이 좋게 여기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시니 이는 우리가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모든 징계가 당장은 즐겁지 아니하고 고통스럽게 여겨지나 후에 그것으로 훈련받은 자들에게는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고난을 사랑하는, 그러나 종종 고통스러운 주님의 징계로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아들처럼 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의 아버지적 징계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주목하십시오. 첫째, 주님은 오직 그의 자녀들만을 징계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겪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언젠가 만족될 신성한 정의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징계를 받습니다. 규율있는 그에 의해. 그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그의 형벌을 받을 것이지만 그의 징계의 수혜자는 아니다. 본문은 "주께서 그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느니라"(6절)고 분명히 말하고, 징계를 받지 않는 자들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8절)고 말한다. 이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단순히 하나님을 창조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만 예약되어 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둘째, 이 본문은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징계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 곧 우리가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10절)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단기적으로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지만, 우리가 “그것으로 훈련받았을 때”(11절)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징계는 단순히 처벌적인 것이 아니라 형성적입니다. 그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데, 그것은 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그것을 거룩함의 경작이라고 정의합니다.

셋째, 이 본문은 인간 아버지의 징계 기능과 천상의 아버지의 징계 사이에 명확한 유추를 그립니다. 저자는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어서 우리를 징계하였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였노라... 그들은 잠깐 자기들이 좋게 생각한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사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심이니라"(9-10절)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는 천상의 아버지의 사랑의 징계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저자가 육신의 아버지들이 "자기들이 좋게 생각한 대로" 징계했다고 말하고, 이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징계하시는 천상의 아버지와 대조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대조의 요점은 인간의 아버지적 징계의 오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 아버지를 위한 징계의 목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부터 오는 징계의 목표와 동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인간 아버지는 목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성경은 인간 아버지에게 항상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로서의 임무에서 은혜를 위해 항상 진정으로 선하신 아버지께 의지해야 한다고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충실함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는 그분이 자녀들에게 시작하신 선한 일을 마무리하는 데 전념하십니다(빌립보서 1:6 참조). 그분은 신실하십니다. 히브리서 2:10은 “만물이 있는 자를 위하여, 또 그로 말미암아 많은 아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이가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신 주 예수님의 인간적 삶을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온전케 하는 것을 결함이 있는 것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온전케 하는 단어는 “완전케 하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요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에게 정해진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와 정신이 모두 성장해야 할 필요성(누가복음 2:42 참조), 유혹의 고통(히브리서 4:15 참조), 죽음으로 끝나는 필멸의 삶의 육체적 고뇌, 고통, 수치(히브리서 12:1-3 참조)를 포함한 인간적 한계를 경험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완전해지는 것이 왜 합당했을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것이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성육신, 삶, 죽음, 부활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의 고난 때문에 우리 천부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는 여러분을 자신의 자원에 맡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는 여러분을 고통 속에 버리지 않으십니다.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 천부께서는 여러분도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그는 충실하시어 여러분을 안전하게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신실함은 인간의 아버지 역할과 적절한 비유가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신실하심은 목표, 곧 그의 모든 사랑의 행위와 그들을 향한 보살핌에 대한 목적을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아버지들은 그들이 인도하고 섬기는 자녀를 위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인간 아버지들이 자녀의 삶의 시간적 세부 사항, 예를 들어 어떤 재능을 개발하고 어떤 직업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인간 아버지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위해 세우신 목표를 그들 자신의 자녀에 대한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아버지는 목표 지향적이어야 하며, 목표는 자녀의 전반적인 영적 선, 즉 그들의 거룩함과 궁극적으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신실한 인간 아버지들은 자녀의 구원과 그들이 영광으로 가는 길에서 거룩함 안에서 평생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싸우고, 일하고, 설득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의 중요성

이 토론을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관점에서 구성하면 인간 아버지로서의 삶의 무게와 영광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로서의 삶은 수행되는 소명, 즉 부르심이며, 코람 데오,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리고 서브 데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그러나 또한 모방 데이, 신을 본받음으로써.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시고, 신자들이 신을 지칭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친밀한 이름인 아버지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그 소명을 성취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신 분입니다.

토론 및 반성:

  1.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권위, 공급, 징계와 지시, 그리고 신실함은 인간의 아버지 역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2. 이러한 면의 좋은 예가 될 만한 인간 아버지가 생각나시나요?

제3부: 경건함 속에서 발전함으로써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

올바른 아버지가 되는 것은 올바른 남자가 되는 것의 하류에 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는 젊은이이든, 현재 아버지로서 격려와 지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든, 다음 섹션이 경건한 남자를 특징짓는 자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를 바랍니다. 

경건함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라는 영어 단어는 God와 like라는 두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경건은 "하나님과 같다"는 의미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제한적인 방식으로 그 아이디어는 확실히 의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과 같다"는 제한된 방식 이상을 포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모든 방식을 포괄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경건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완벽한 경건함은 우리가 이 삶에서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우리는 항상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건함의 훈련의 필요성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건치 못한 어리석은 신화와는 아무 상관도 하지 말고 오히려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훈련하라.육체의 훈련은 어느 정도 유익하나 경건은 모든 면에서 유익하니 이생과 장래의 삶에 약속이 있느니라.이 말씀은 믿을 만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니라.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음이요, 그는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니라.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딤전 4:7-11)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만 주목하세요. 첫째, 경건함에 있어서의 발전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해야합니다 "기차 경건을 위하여 자신을 훈련시키라”(7절). “훈련시키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주로 격렬한 운동 경기를 위해 훈련하는 운동선수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운동 성과와 기술은 자동적으로 발전하고 향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동선수는 경쟁에서 탁월하기 위해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힘을 키우는 데 시간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멈추고, 원초적인 재능이나 과거의 훈련 노력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면, 그는 향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 나빠질 것입니다. 그의 힘, 인내, 기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감소할 것입니다. 운동선수에게 정체되어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운동선수에게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은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며, 때로는 희생적이고 고통스럽게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위하여(경건) 우리는 수고하고(열심히 일하고) 힘쓰나니”(10절)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경건함에 있어서 자신을 훈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경건하게 가르치는 데 선행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11절)고 말하기 전에 자신을 훈련하라고 말합니다(7절).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이런 것들을 실천한다고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라고 썼습니다. 우리 수고하고 힘쓰라”(10절). 이 관찰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관련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엡 6:4). 즉, 아버지는 경건함을 “명령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경건함을 가르치는 데는 경건함에 대한 훈련이 선행 조건이다. 

경건함을 위한 훈련을 위한 실제적인 단계들

당신은 "경건함에서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훈련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단계는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실제적인 훈련 연습 목록입니다. 각각은 경건함에서 발전하기 위해 당신의 삶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습관입니다. 이 목록은 포괄적이지 않지만 대표적입니다. 경건함을 위한 훈련에는 이 목록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되지만,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더 적은각 항목에 대한 논의는 포괄적이지 않으며, 아래 나열된 각 항목과 관련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제공하는 The Mentoring Project의 다른 리소스가 있습니다. 

경건을 위한 훈련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섭취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시편 119:9에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어떻게 자기 길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겠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당신의 말씀대로 지킴으로써”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11절에서 “내가 당신께 범죄하지 아니하도록 당신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경건한 아버지로서 주님과 당신의 가족을 섬기기 위해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정보, 호소, 광고, 철학의 홍수가 소셜 미디어, 주요 미디어, 음악, 영화, 책, 대화, 이메일, 광고판, 이미지 등 다양한 홍수문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쏟아집니다. 이 홍수는 대체로 신이 계시한 진리를 반영하지 않지만, 그와 상반됩니다. 홍수는 씻겨 내려가는 땅을 형성합니다. 미래의 물 흐름을 위해 협곡을 조각하고, 풍경을 침식하고, 구조물을 파괴합니다. 여러분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그리고 아마도 특히 당신이 깨닫지 못한다면), 이 메시지의 홍수는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세상적인 메시지를 신성한 메시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경건함에 훈련받을 희망이 무엇입니까? 오직 성경만이 당신의 마음, 당신의 온 자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딤후 3:16-17 참조). 매일 성경에 시간과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당신은 진리에 따라 영향력의 흐름을 지시하는 올바른 종류의 협곡, 심지어 강바닥을 조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섭취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집어 들고 읽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다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평균적인 독서 속도로는 대부분 사람들이 하루에 20분도 안 걸려 1년에 성경 전체를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매일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독서 계획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을 섭취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경을 듣는 것입니다. 휴대전화 앱에는 종종 성경 오디오 버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운전할 때, 잠자리에 들 때 또는 다른 곳에서 듣기로 선택한 곳에서 성경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특히 성경 구절을 암기할 때 유용합니다. 성경을 섭취하는 또 다른 방법은 구절을 암기하고 신중하고 주의 깊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배에서 공개적으로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는 것을 통해 성경을 섭취할 수 있고 섭취해야 합니다.

경건함의 훈련에는 지역 교회에서 정기적인 합동 예배에 참석하는 패턴이 포함됩니다.

히브리서 10:24-25은 “또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함께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히려 서로 권면하며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자”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권면하고 경건하게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수적인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지역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지역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합니다. 

당신이 성경을 믿고, 가르치고, 순종하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눈에 띄는 결함이며 경건함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당신의 신실함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신실한 교회를 찾아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회원이 되십시오. 당신이 지역 교회에 속해 있다면,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그 연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마태복음 18:20). 경건함(과 아버지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지역 교회에 헌신하십시오. 

경건의 훈련에는 정기적인 기도가 포함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전 5:17)고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이 매 순간 기도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계속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이렇게 의역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바울은 악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 그들이 지치고 세상적이 되어 경계심을 잃게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경건함이 약해지는 첫 징후 중 하나이며, 분명히 봉사에서 효과가 없다는 징조입니다. 경건함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려면 훈련되고 규칙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늘의 영광의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의 악에 대한 전사의 사고방식을 포함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를 파괴하려는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전쟁의 삶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엡 6:10-18, 베드로전서 5:8 참조).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기도는 이 전쟁의 긴박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합니다. 야고보서 4:2b-3은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가 신자의 손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전쟁 중의 워키토키를 가정용 인터콤으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전쟁이라고 믿기 전까지는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도는 전쟁 중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자 아버지가 되려면 쉬지 않고 긴박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로서 경건함을 훈련하는 것에는 성경적으로 형성된 남성성을 기르는 것도 포함됩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엄청난 혼란과 망상의 시대에 "성경적으로 형성된 남성성"과 같은 용어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그 용어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특히 남성에게 적합한 성격적 특성과 행동 패턴경건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람으로서 부름받은 역할에 적합한 성격적 특성과 행동 패턴을 의도적으로 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리더십은 그러한 자질/패턴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남성에 대한 하나님의 규범적 설계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창세기 1:28과 2:24), 하나님께서 결혼한 남성이 아내(엡 5:22-23)와 자녀(엡 6:1-4)를 그러한 관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인도하기를 의도하셨기 때문에 모든 남성은 리더십 기술을 기르면서 가정에서 그러한 행동 패턴을 효과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남성이 창조물을 경작하고 돌보는 데 있어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도록 설계하셨기 때문에(창세기 2:15-16), 남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리더십 기술을 기르고 행사하는 것은 옳고 좋은 일입니다. 

더욱이 경건한 사람들은 리더십 책임을 행사할 때 자제력과 온유함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압제적인 지배, 즉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리더십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방 나라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을 "주관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왕국의 시민들은 자신에게 큰 개인적 비용이 들더라도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최상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인도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제력과 온유함의 특성으로 특징지어져야 합니다(갈라디아서 5:22-23). 그러나 특히 남자들은 권위를 행사할 때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활용하여 그들의 리더십이 세상적인 지배가 아니라 경건하고 목표 지향적이며 종의 자세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에는 정기적인 고백과 회개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완전함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태복음 5:48). 우리는 이 현 시대에 완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예수님의 재림 때 영광을 받을 때까지 우리 마음에서 완전히 근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안에서는 의로움을 향해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역사와 우리를 사악함으로 강요하는 죄 많은 육신의 권세 사이에 전쟁이 있습니다(롬 7:22-23, 갈라디아서 5:16-23 참조). 

우리는 현 시대에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12-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이것을 얻었거나 이미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으므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힘쓰나니 형제들아,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직 한 가지 일만 하노니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힘쓰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부르시는 상을 위하여 목표를 향하여 힘쓰나니.

영적 성장과 진보를 완성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주요 부분은 죄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고 회개로 이끄는 성령의 자비롭고 고통스러운 확신을 경험합니다. 요한일서 1:8-9은 이와 관련하여 교훈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경건함 안에서 자신을 훈련하는 사람은 죄를 자백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인상 중 하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어린 성인으로서 처음으로. 위대한 사자 아슬란은 여러 번이나 페벤시 아이들 중 한 명에게 그들이 잘못한 일에 대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맞섰습니다. 그 아이는 마치 죄악이 자기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니면 그 죄가 실제보다 더 예의 바르고 덜 이기적으로 보이도록 이야기에서 어떤 세부 사항을 생략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슬란은 항상 낮은 으르렁거림으로 대답했습니다. 에드먼드, 루시, 수잔, 피터 등 누구든 항상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죄에 대한 모든 진실을 말하십시오. 그것을 그대로 부르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은 당신의 용서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되어 경건을 위한 훈련 습관을 기르는 것은 미래에 아버지가 되거나 지금 더 나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남자들이여, 경건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토론 및 반성:

  1. 영적 훈련이 당신의 삶에서 규칙적인 부분인가요? 이런 습관을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
  2. 제자들 안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도와줄 사람을 누구를 초대할 수 있을까요?

4부: 충실한 아버지로서의 머리 직분을 행사함(엡 5-6장)

성경 전체에서 가정 내의 가족 관계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지시는 에베소서 5:18-6: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5:18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지시합니다. 이 구절인 성령으로 충만해짐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유사한 구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성령께 항복하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정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해지라"는 명령은 갈라디아서 5:16-23에서 발견되는 "성령 안에서 행하라"는 명령과 동의어인 듯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명령한 후, 그렇게 충만해지는 효과에 대한 일련의 설명을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고(19절), 하나님께 감사하며(20절),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 질서, 특히 가정에서 구축하신 권위와 복종의 구조적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복종할 의향이 있습니다(21절). 바울은 22절부터 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는 남편-아내 관계에 대한 지침으로 시작하여(22-33절) 부모-자녀 관계에 대한 지침으로 바로 이어집니다(6:1-4). 사도가 남자에게 사용한 주요 칭호는 "머리"입니다. 바울은 "남편은 아내의 머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이니라"(23절)고 말합니다. 나중에 바울은 아버지라는 그의 구체적인 소명에서 가정의 머리를 언급하지만(6:4), 이 구절에서 머리 직분에 대한 바울의 모든 지침은 부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의 봉사로서의 아버지적 우두머리 역할

바울은 아내들에게 “주님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고 가르칩니다. 바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23절). 아내들에게 복종에 대한 가르침은 머리의 위치가 권위와 리더십의 위치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가정의 머리로서 리더가 되는 임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남편들에게 내린 정확한 명령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내가 머리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에 우리는 “남편들이여, 아내를 인도하라” 또는 머리 직분의 권위를 명확히 하는 다른 명칭을 읽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남편들이여, 사랑 아내들에게.” 권위가 가정되는 반면, 사랑에 대한 지시는 바울이 남편에게 내린 명령의 초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으로부터 머리 직분이 권위나 리더십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구절과 나머지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편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데, 이는 남편의 역할에서 권위와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렇지 않다면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자녀에게 순종하라고 말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로부터 참되고 경건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배웠기 때문이다. 경건한 리더십은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리더십은 섬김이며, 충실한 지도자는 항상 자신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지시를 내릴 것이다. 

예수님의 모범은 25절에서 가장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바울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같이".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주님이시며 제자들 위에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충실하게 권위를 행사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말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오셨습니다"(마태복음 20:28).

가족의 수장의 사랑의 리더십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6:1에서 바울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 둘 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양육의 임무가 남편과 아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녀를 인도하는 방법에 대한 긍정적인 지시는 아버지에게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아버지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징계와 훈계로 양육하라"고 썼습니다(엡 6:4).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양육 역할이 자녀에 대한 리더십과 권위이며, 자녀의 아버지인 남편의 인도를 따르는 도우미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러한 가정 지침을 줄 때 염두에 둔 창세기 1:26-28과 2:18-24에서 보는 패턴을 따릅니다(바울은 에베소서 5:31에서 창세기 2:24를 인용함). 남자와 아내는 모두 형상을 지닌 자로서 창조된 질서를 다스리라는 말을 듣습니다(창세기 1:28). 창세기 2장의 창조 기록에서 우리는 여자가 남자의 "도우미"로서 형상을 지닌 자로 창조되었고, 남자는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언약적 책임에 관한 지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머리로 묘사되고 하와가 그의 도우미로 묘사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에게는 자녀의 지도에 대한 주요 지시가 주어지고 어머니는 그 역할에서 도우미입니다. 

아버지들에게 특별히 교훈하면서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이 명령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지도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자녀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와 복지에 무관심한 태도를 행사하거나 자신의 변덕과 쾌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자녀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의된 대로 자녀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자녀를 인도합니다. 바울은 자녀의 이익을 온전히 드러낸 후에야 아버지들에게 “주님의 징계와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합니다.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엄청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당신의 목표는 자녀들에게 "주장하는 것"(이방인들처럼, 마태복음 20:23-28 참조)이 아닙니다. 당신의 목표는 단순히 권위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로서의 당신의 목표는 자녀들이 당신의 징계와 훈계로 경건함을 향해 인도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분노를 유발하지 않고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 성격, 불안, 괴롭히는 죄, 강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녀를 잘 알면 자녀에게 필요한 징계와 훈계가 어떻게 효과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징계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러한 결과를 추구하는 방식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지혜의 문제입니다. 열한 살 딸에 대한 저의 징계와 교육은 열네 살 아들에 대한 것과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효과적인 동일한 전략이 딸을 화나게 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됨의 다음 측면인 권위, 징계, 교육으로 넘어갈 때, 이 첫 번째 측면인 섬김과 사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첫 번째 원칙을 소홀히 하면 나머지는 단락됩니다.

권위적 리더십으로서의 아버지적 지도력

하나님이 주신 머리라는 직분은 권위를 수반하는 직분입니다. 가족의 머리로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모든 남자가 직장, 교회 또는 지역 사회에서 권위 있는 리더가 되도록 부름을 받거나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남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일하고 봉사할 수 있는 다른 은사와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은사가 있고 집 밖에서 그러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반드시 더 남자답거나 더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집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십니다. 모든 남자들 가족의 수장으로서 지도자가 되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 결혼한 남자라면 아내의 수장입니다. 자녀를 둔 남자라면 자녀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남자가 집에서 권위를 행사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들은 경건한 권위가 이기적인 지배가 아니라 사심 없는 사랑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다른 남자들은 그들이 부름받은 권위의 위치를 실제로 받아들이도록 촉구받아야 합니다. 남자들이여, 가족에 대한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책임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훈련으로서의 아버지적 우두머리 직분

바울이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양육하라”고 지시할 때,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을 밝혔습니다. 징계와 훈계(엡 6:4). 각각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이 현장 안내서에서 앞서 징계가 단순한 처벌 이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징계를 받는 사람의 궁극적인 안녕과 형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히 12:10). 따라서 징계는 특별한 종류의 훈계입니다. 구체적으로, 징계는 처벌적 결과의 형태를 취하는 종류의 훈계입니다. 징계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동일한 구절에서 “모든 징계가 당장은 즐겁지 아니하고 고통스럽게 여겨지나니”라고 말씀합니다(히 12:11).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버지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내용의 대부분이 솔로몬 왕이 그의 아들에게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그 말씀은 모든 아버지와 모든 아들에게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에서 자주 반복되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의 주제 중 하나는 징계입니다. 특히 잠언은 두 가지 뚜렷한 종류의 징계, 즉 막대기와 꾸지람을 식별합니다. 

잠언에서 "막대기"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형태로 때리는 데 사용되는 막대기나 지팡이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잠언은 막대기가 어리석은 자의 등에, 즉 지혜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의 등에 사용된다고 가르칩니다(잠언 10:13, 26:3 참조). 잠언에서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두려움과 지식의 열매입니다(잠언 1:7, 9:10).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어리석음(때로는 어리석음으로 번역됨)이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한때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났고, 내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라고 한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로 모든 아이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채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엡 2:1-3). 이런 이유로 솔로몬은 일반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을 처벌하는 좋은 수단인 막대기가 어린이를 징계하는 데도 완벽하게 적합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리석음은 아이의 마음에 얽매여 있으나 징계하는 막대기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 22:15)고 썼습니다. 다른 잠언에서는 "아이를 징계하는 것을 아끼지 말라 막대기로 때리면 죽지 아니하고 막대기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고 읽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징계할 때 신체적 처벌(또는 매질)을 사용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대다수 조언자들의 어리석음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아이에게 유익하며, 잠재적으로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기적을 도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부모가 자제력이 없고 복수심에 사로잡혀 신체적 처벌을 사용하면 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아버지적 보살핌을 자녀에게 베푸는 것을 본받는 아버지는 자녀의 유익을 위해 자녀를 징계할 것이며, 거룩함 안에서 장기적으로 형성한다는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자녀의 엉덩이를 때리는 것은 당장은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것으로 훈련받은 자들에게는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브리서 12:11). 

잠언에서 발견되는 다른 형태의 징계는 꾸지람입니다. 막대기가 신체적 처벌의 형태인 반면, 꾸지람은 언어적 처벌의 형태입니다. 꾸지람은 잘못한 일에 대한 비난의 말인 것입니다. 꾸지람은 죄악적인 행동을 식별하고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즉 하나님 보시기에 멸시스럽고 사람 보시기에 부끄러운 것이라고 부릅니다. 꾸지람은 승인을 신경 쓰는 사람, 적절한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양심이 예민한 사람에게만 효과적입니다. 다시 말해, 꾸지람은 꾸지람을 당한 사람의 마음에 어느 정도의 지혜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잠언 13: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 비웃는 자(어리석은 자를 가리키는 다른 말)는 꾸지람을 듣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또는 잠언 17:10을 생각해 보세요. "명철한 자에게 꾸지람은 백 번 때리는 것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이런 이유로 꾸지람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더 효과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상적으로는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징계 수단으로 "꾸지람"을 사용하는 효과가 증가하여 징계 도구로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이 비례적으로 감소할 수 있습니다. 

지시로서의 아버지적 지도력

바울은 징계 외에도 “훈계”를 주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수단으로 규정합니다(엡 6:4). 징계는 처벌적 조치를 사용하는 일종의 지시이지만, 이 구절에서 “훈계”로 번역된 단어는 구체적으로 말을 사용하여 가르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징계는 죄에 대한 반응으로 이루어지지만, 지시는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과정을 감독할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훈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이 누구이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자녀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출 20:12). 이 계명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의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의 계명이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약속과 연관되는 이유입니다. 이 명령과 약속의 논리는 분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님의 법을 가르칩니다. 자녀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 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결과는 땅에서 오래 사는 것입니다.

신명기 6:6-7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님의 법을 가르치라고 촉구함으로써 이 논리를 명확히 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두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 이 말씀을 강론할지니라." 모세가 주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언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것을 유의하십시오. 먼저, 7절 끝에서 그는 "네가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나"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하루를 시작하는 활동입니다. 이 표현의 요점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일이 하루 종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주님의 말씀을 항상 우리 마음에 간직한다면(6절)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칠 기회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모세는 이 지시가 “네가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걸을 때”에 행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가 집에 앉았을 때”라는 문구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이 목적을 위해 모였을 때 집에서 공식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공식적인 지시의 시간은 교사가 청중에게 연설하기 위해 앉는 것을 포함했습니다(오늘날 공식적인 연설자가 청중 앞에 서는 관습과는 상당히 다름). 아마도 모세가 염두에 둔 것은 가족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어느 정도 말씀에서 교훈을 얻는 시간일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가족 예배”라고 부릅니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하나님 말씀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받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네가 길을 걸을 때”라는 문구는 아마도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종류의 가르침을 가리킬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주의 징계와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말할 때, 그는 징계와 훈계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다른 누구보다 아버지의 어깨에 더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부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징계와 훈계에 참여하지만, 이상적으로는 모범과 리더십을 통해 그러한 징계와 훈계가 표준인 가정을 가꾸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토론 및 반성:

  1. 아버지의 지도력의 어떤 측면, 즉 사랑의 섬김, 권위적 리더십, 규율, 지시 중에서 가장 성장할 수 있는 측면이 있나요? 아내(그리고 아마도 자녀들!)와 함께 이러한 영역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평가해 보세요.
  2. 당신은 신명기 6장 6-7절을 당신의 가족 안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결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도움 받으십시오

가장 큰 아들이 신부와 함께 통로를 걸어 돌아오는 동안, 아버지로서의 내 역할에 대한 깊은 분석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런 성찰을 한 후 내린 깊은 결론은? 나는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제시한 지침에 따른 아버지로서의 행동의 예가 많지만, 이러한 것들에 따르지 못한 예도 무수히 많습니다. 아버지로서,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롬 3:23). 때때로 나는 사랑으로가 아니라 이기적으로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다른 때에는 권위를 포기하고 대신 내 리더십이 필요한 분야를 무시했습니다. 때때로 나는 죄악적인 분노와 이기심 때문에 자녀를 징계했습니다. 다른 때에는 게으름 때문에 징계를 소홀히 했습니다. 때때로 나는 길을 가는 동안 자녀들을 가르칠 기회를 놓쳤습니다. 또 다른 때에는 집에 앉아 공식적인 교육을 위해 그들을 모으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 아버지로서의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같은 고백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상황은 훨씬 더 절박해 보일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가족은 에베소서 5-6장에 묘사된 패턴(남편과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싱글 아빠일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아이들은 현재 당신과 함께 살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정기적으로 돌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 아버지의 반복적인 단점이든, 집에서 더 두드러진 깨진 패턴이든,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아버지로서 우리는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저는 두 가지 훈계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버지로서의 이상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아 노력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완전한 경건에 대해 말한 것은 아버지로서의 경건에도 해당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힘쓰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 부르시는 상을 위하여 목표를 향하여 힘쓰나니"(빌 3:13하-14).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 사함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특별하고 언약적인 방식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본받으려고 노력할 때, 당신은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렇게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한계를 알고 당신이 ~ 아니다 하나님.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당신의 약함 속에서, 아버지로서 약하지 않은 분을 바라보십시오. 실패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피곤 속에서, 지치거나 지치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유일하고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종류의 아버지,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아버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Kyle Claunch는 Ashley의 남편이자 여섯 자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지역 교회에서 직업 목회 사역을 20년 이상 해왔습니다. 그는 현재 Kenwood Baptist Church의 장로로 일하며 정기적으로 일요 학교를 가르치고 새로 설립된 Kenwood Institute의 강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Kyle은 또한 2017년부터 Louisville, KY에 있는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 신학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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