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관리하기
Matt Damico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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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사도 요한은 친구 가이오에게 짧은 편지를 썼습니다. 심지어 메모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쓸 것이 많다"고 했지만, "곧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적지 않았습니다(요한삼서 13-14절).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빼먹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무엇을 포함시켰는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요한이 가이오의 처신을 칭찬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가이오를 지지한다는 것을 표현한 격려적인 작은 편지입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요한의 인사입니다. 그는 가이오에게 모든 것이 잘되기를 기도하고, "당신의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당신도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요한삼서 2절).
알아들었나요? 존이 친구를 위해 한 기도 중 하나는 그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했을까요? 분명 가이오를 위해 기도할 때 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맞죠?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존의 인사와 기도 아래에는 우리 몸이 중요하고, 우리 몸의 복지가 기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가이드를 통해 여러분이 성경에서 인체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몸의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이해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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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구체화된 시작
많은 중요한 주제에서 그렇듯이, 고려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창세기의 첫 장입니다. 모세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구조물을 형성하시고, 생명으로 채우셨다고 말함으로써 장면을 설정합니다. 매일 새로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빛이 비치고, 땅이 형성되고, 식물이 돋아나고, 생물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신성한 판결을 읽습니다. 그는 주권적인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섯째 날은 줄거리의 반전을 제공합니다. 자연 세계의 형성을 완료한 신은 의논을 하고 이 창조물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확장하고, 다스릴 무언가를 창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
하지만 이 창조물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무도, 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통치권을 행사하라는 임무를 주신 후, 하나님은 이 형상을 지닌 창조물이 “매우 좋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마도 당신은 창세기 1장이 끝날 무렵에 우리가 인간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서는 상당히 알게 되었지만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다 또는 신이 그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그러니 우리는 계속 읽으며 창세기 2장에서 그 장면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피조물이 되었더라"(창세기 2:7)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첫 번째 엿보기가 있습니다. 그는 흙의 먼지로 창조되었고, 땅에서 지어졌으며, 그런 다음 생명의 숨결로 채워졌습니다.
계속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채우고 통치할 일을 주셨으므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창 2:18)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홀로 있을 때는 이룰 수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물들 사이에는 적합한 짝이 없으므로, 주님은 이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합당한 돕는 자를 만들어 주리라.” 그러자 주님은 “사람에게 깊은 잠을 주시니,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취하신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사람에게로 데려오시니라”(창 2:21-22). 여자가 남자를 돕는 자로서 적합한 것은 그녀가 ~에서 그를.
아담과 이브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같은 육체적, 구체화된 존재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은 아담과 신체적 특징을 공유합니다. 당신이 여자라면, 당신은 이브와 그것을 공유합니다.
창세기의 이 초기 장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인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론적이지만, 또한 기초적이기도 합니다. 이 장들에 담긴 영감 어린 서사가 없다면, 우리는 추측과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신체 이해에 어떻게 기여할까요? 몇 가지 답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 신은 우리의 몸을 창조합니다. 즉, 그는 우리가 그 몸을 갖고, 그가 보는 방식으로 그 몸을 보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창조하십니다 좋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실수를 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만드실 때도 실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담과 이브를 육화된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 전에 창세기 3장의 타락. 그들의 몸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선한 창조의 일부였습니다.
- 우리는 우리 몸을 받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요점의 반대입니다. 그는 주시고, 우리는 받습니다. 이 간단한 진실은 우리 주변에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신 그들이 자신의 물리적 현실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빈 캔버스가 아닙니다. 몸에는 하드와이어된 몇 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은 우리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말해줍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함으로써 행하신 일을 전복할 권리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 몸의 현실과 맞춥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만드셨고, 우리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 우리의 몸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을 주시고, 우리에게 몸으로 수행할 과제를 주십니다. 열매를 맺고,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몸을 관리하고 싶어합니다.
토론 및 반성
- 창세기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에서 언급한 것 중 이전에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 현재 우리 몸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가 무너지고 있는 문화적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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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육화된 신
창세기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을 갖게 하셨고 우리의 몸이 좋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축복받은 삼위일체는 신격 안에서 영원히 완벽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요한 복음은 신격의 두 번째 인격이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느니라"(요한복음 1:1). 말씀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와 함께 하나님과 ~처럼 하나님.
이것들은 정신을 뒤틀고 영혼을 확장하는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됩니다. 몇 구절 후에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노라"(요한복음 1:14)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오셨고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대부분 영으로 남아 있었고 오직 나타났다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아니요. 사실, 그 믿음은 1세기부터 위험한 거짓 가르침으로 비난받아 왔습니다. 예수는 사람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하고 진정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들은 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을까요? 육화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구원은 우리의 온전한 자아, 몸과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 그는 우리와 온전히 닮아야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혈육에 참여하였으므로 그도 또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평생 종살이에 얽매인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려 하심이니라. 이는 그가 천사들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자손을 도우시는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그는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일에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 하심이니라. 이는 그가 시험을 받으실 때에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4-18).
예수께서는 육신을 취하신 것은 육신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으므로 우리를 최대한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초기 교회 작가 중 한 명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치유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신성과 연합된 것은 구원받습니다. 아담의 절반만 타락했다면,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고 구원하시는 것도 절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 전체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태어난 분의 전체 본성과 연합되어야 하며, 따라서 전체로서 구원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완전한 인간 본성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몸은 그림에서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반쯤 좋은 소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은 그리고 우리 몸은 죄의 영향을 받으며 구원이 필요합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선하게 창조된 몸은 연약함과 약함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어려워졌고, 그의 몸은 병들고 다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항상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며, 노화 과정으로 인해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셨던 그분은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셨습니다(빌립보서 2:6-7). 그분은 왜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까? 인간 형상으로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받아들여진 것만이 구속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그것은 복음서에 있습니다. 예수는 자라시고, 먹고, 자시고, 울고, 노래하고, 살고, 죽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발을 붙잡았다"(마태복음 28:9)고 기록했습니다. 마태는 왜 그렇게 세세한 내용을 전했을까요? 제자들이 보고 만지고 있는 것이 실제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는 부활 전이나 후에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사람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승천하셨고(사도행전 1:6-11), 지금은 인간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위해 몸을 취하셨고, 육신을 지닌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토론 질문
- 당신은 타락의 영향이 당신의 신체적 삶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나요?
- 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셔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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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신체의 역할
우리 몸은 단순히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매우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가지다, 영구적인 옷 세트와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몸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우리 몸과 별개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버전. 인간은 구체화된 영혼으로 존재하며,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확립된 것처럼 이것은 매우 좋은 배열입니다.
이제 우리 몸이 신이 주신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게 뭐에 쓰이냐?"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몸을 관리하기 위한 실용적인 단계를 나열하고 싶은 유혹이 들 수 있지만, 우리 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망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이 목재와 벽에 못을 박는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전혀 관련 없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원래 의도한 용도가 아닌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망치로 스파게티를 먹어보려고 하면 입에 국수 몇 개가 들어갈 수 있겠지만, 망치의 용도는 그게 아닙니다. 망치의 용도를 알고 나서야 망치를 효과적으로 휘두르는 데 필요한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한 청지기의 기술을 알기 전에 먼저 몸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만들어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로마서 12장 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독자들에게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촉구합니다. 우리는 제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선, 제사는 바쳐질 때 보통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는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인 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요한복음 1:29). 그러므로 더 이상 피의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충분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구약의 제사로 우리 몸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대신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의 일환으로 보라고 권고합니다. 우리의 모든 자아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몸과 영혼이요.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즉 온 마음과 온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썼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로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는 우리 몸이 죄의 도구가 아니라 의의 도구가 되고 거룩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제사는 우리의 살아있는 몸으로 드려지며,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합니다(고전 10:31).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이 내린 지시의 한 가지 의미는 "예배"가 단순히 일요일 아침에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공동체 예배를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라고 명령합니다(히브리서 10장 24-25절). 하지만 로마서 12장은 교회에 가는 것 이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해, 그분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몸과 별개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조차도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고, 로마서 12장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살아있는 제사의 일부입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리적 몸은 우리의 영적인 예배.
위에서 질문한 "우리 몸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답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몸은 경배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창조주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기 위해 해야 합니다.
풍성한 지배
우리 몸의 목적을 생각할 때 또 다른 중요한 고려 사항은 창세기에서 나옵니다. 주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창세기 1:28).
이것이 우리 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글쎄요,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의 핵심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창조된 질서에 대해 "주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명령의 두 부분은 모두 본질적으로 신체적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번성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데 모두 우리 몸을 사용해야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단지 우리가 가지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열매를 맺고 통치하는 것 이상의 부름을 받지만, 그보다 덜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우리가 통치하고 번성하라는 부름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줍니다.
토론 및 반성
- 당신의 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그 의도된 목적은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지와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 일요일 아침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예배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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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청지기 고려 사항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가 확립되었으니,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을 가진 영혼으로 창조하신 것은 그분을 경배하기 위한 목적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몸의 선함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인 문제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신이 주신 이 몸을 충실하게 관리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중요한 범주를 고려하고 싶습니다. 에덴에서 주님은 아담에게 동산을 "일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범주는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아주 잘 부합합니다.
I. 정원 일하기: 신체 훈련
미성숙한 사고방식의 한 가지 징후는 누군가가 문제를 두 가지 범주로만 나눌 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과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경의 권위만큼 시급하지 않은 온갖 신학적 문제와 질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질문들이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제가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성만큼 중요한가요? 아니요.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순위를 매기거나 분류하고 적절하게 고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신체적 훈련에 대한 질문에서 바로 이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경건을 위하여 자신을 훈련하라. 경건은 모든 면에서 가치가 있어 이생과 장래의 삶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고 썼습니다. 바울은 경건을 위한 훈련이 디모데의 삶과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경건은 이생과 영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경건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전체 구절을 포함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for"와 "godliness" 사이의 생략부호에는 "육체의 훈련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든 단어를 포함하여 구절을 다시 읽어보세요.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육체적 훈련은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경건은 모든 면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위한 훈련과 우리 몸을 훈련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경건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무언가가 가장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대신 그는 신체적 훈련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확언합니다.
만약 신체 훈련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 몸을 훈련해야 한다.
운동
저는 개인 트레이너도 아니고 바디빌더도 아니며, 이 가이드의 목적은 여러분에게 트레이닝 플랜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전달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몸은 충실하게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몸을 트레이닝하는 데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트레이닝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신체 훈련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즐기는 일을 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해야 한다 하고, 그런 다음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달리기로 한 결정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해야 한다 그걸 같이 하세요, 하지만 제가 정말 즐기지는 않는 것, 스트레칭과 부상을 막기 위한 특정 운동과 같은 것. 그리고 달리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거나 들을지 계획하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지난주에 달리러 나갔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교회에서 할 수업의 개요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즐겼고, 신의 은총으로 시간을 더 늘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근육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위축을 예방하고 계속 달릴 수 있도록 웨이트를 들어 올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만큼 젊지 않아서 달리는 거리와 들어 올리는 양에 제한을 주는 통증이 있지만, 그런 활동이 즐겁고 지금은 효과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무엇 우리는 그렇지만 저것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몸이 영적 예배에 사용되기를 원한다면(롬 12:1), 그리고 우리가 충실하게 통치권을 행사하기를 원한다면(창 1:28), 우리는 신체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체 훈련의 이점을 나열하기에 앞서, 먼저 잠재적으로 있을 수 있는 함정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
-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하신 것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수명을 정해 놓으셨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정기적으로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제 가족에서 저보다 앞선 세대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두 분과 조부모 네 분 중에서 70세 이상 산 분은 한 분뿐이었고, 그 중 세 분은 60세까지 살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의 많은 사람들이 신체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려는 저의 동기 중 하나는 조상들보다 더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을 해도 하나님께서 제게 정해 주신 날들을 늘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책에 그 모든 날이 기록되어 있고, 아직 하나도 없을 때에 나를 위하여 정하여진 날들이니이다"(시편 139:16)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영광스러운 위안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정확하게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죽음의 날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비슷한 요점을 제기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의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6:27). 그러므로 누군가가 운동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날의 양을 늘릴 수는 없지만, 규칙적인 운동은 우리의 날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당신은 아마도 운동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운동한다는 것을 알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체 훈련은 청지기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허영심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추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하고 매력적이더라도 성경은 강한 자는 자신의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렘 9:23) 아름다움은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잠 31:30).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고, 신체 훈련이 이런 자기중심성의 표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운동에 대한 우리의 헌신으로 인해 책임의 다른 영역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함정은 운동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신체 훈련을 추구하면서 알아야 할 위험입니다. 운동의 이점은 너무나 많아서 위험을 훨씬 능가합니다. 몇 가지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익
첫째, 운동은 자제력을 북돋아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제력을 실천하라고 거듭해서 요구합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쓰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했을 때 - 나이 든 여성, 나이 든 남성, 젊은 여성, 젊은 남성 - 자제력은 미덕 목록에 가득합니다. 사실, 젊은 남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침은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디도서 2:6)! 잠언도 자제력을 요구하며,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성과 같으니라"(잠언 25:28)고 경고합니다.
이것이 신체 운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신체 훈련은 자제력을 필요로 하고, 자제력을 장려합니다. 자제력이 필요한 이유는 운동을 하려면 언제, 어디서 할지 계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정에 운동을 할 시간이 크게 없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을 것이고, 그런 날에는 정신을 다스려야 합니다(잠언 16:32). 바울이 "모든 운동선수는 자제력을 행사한다"(고전 9:25)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운동은 자기 통제를 장려합니다. 제가 진실이라고 발견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분야에서 자기 통제와 규율은 다른 분야에서도 자기 통제와 규율을 낳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더 규율 있게 사용하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얼마나 자는지에 대해 더 의식하게 만들 것입니다.
두 번째이자 그에 따른 이점은 운동이 게으름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계획은 많지만 행동은 없습니다. 그는 또는 그녀는 몸매를 만들고 자제력을 행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이 좋은 시기가 아니라는 변명은 항상 있습니다. 아무리 적당한 운동이라도 운동 루틴을 시작하는 것은 게으름에 대한 공세를 취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널리 알려진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이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점에는 에너지 증가, 체중 조절 개선, 수면 개선과 같은 신체적 도움이 포함됩니다. 그런 다음 기분을 좋게 유지하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는 것과 같은 정신적, 감정적 이점이 더 많습니다. 저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운동은 일종의 시간 증가제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을 하기 위해 하루 중 시간을 내야 하지만, 운동 후에 에너지가 증가하면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은 시간이 걸리지만, 운동을 마쳤을 때 제가 하는 일의 질이 향상됩니다.
제가 언급할 마지막 이점은 운동을 통해 우리 몸을 돌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어린 자녀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바닥에 앉을 수 있을 만큼 민첩하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 당신의 몸이 예상보다 일찍 쇠퇴하지 않는다면, 배우자는 감사할 것입니다.
- 귀하의 교회는 아마도 신체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끔 이사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일정이 귀하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환영할 만한) 이유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귀하의 신체 상태가 귀하를 실격시키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들보다 더 많은 이점이 있지만, 요점은 알겠죠. 문제는 운동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개를 더 많이 산책시킬 수 있을까요? 아이들의 크로스컨트리 팀을 지도할 수 있을까요? 저렴한 헬스장 멤버십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배우자와 함께 산책을 하고, 매일 아침 팔굽혀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를 할 수 있을까요? 신은 우리에게 훈련 계획을 주지 않으시고, 우리가 피트니스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신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충실한 청지기가 되는 것뿐입니다.
토론 및 반성:
- 당신은 신체적 훈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당신이 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입니까?
- 당신의 훈련 습관은 어떤가요? 훈련을 하시나요? 바꾸고 싶거나 해야 할 변화가 있나요?
- 꾸준히 운동을 한다면, 주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II. 정원을 지키세요: 음식과 섹스
“너희 몸은 너희 안에 있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 몸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식과 섹스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 상당히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음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식
성경은 삶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지혜와 지침의 신성한 영감의 근원이며 음식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합니다. 음식에 대해 가르치는 기본적인 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공급은 그에게서 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실 때, 그는 청원을 포함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마태복음 6:11).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우리가 매일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셔야 한다는 진리로 향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같은 장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바로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목숨에 대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몸에 대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5-26)
저는 미국적 풍요의 문화에서 자란 우리 대부분이 다음 식사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식료품점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유혹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가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모든 공급의 근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식물과 나무를 "먹을 것"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9). 그런 다음 창세기 9장에서 노아에게 "살아 있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되리라"(창세기 9: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자라는 동물과 씨앗을 창조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시편 146:7)이 주님이시며,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바라보고, 주께서 제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시편 14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이 진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적절한 반응은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음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니라"(딤전 4:4-5). 우리의 식사 전 기도가 이 진리를 반영하기를 바랍니다. 즉, 우리의 음식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우리는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의 공급에 응답하는 두 번째 방법은 그가 주시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전반에 걸쳐 이 응답을 강조합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을 살펴보세요.
-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나니 이것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의 손에서 난 것이로다”(전도서 2:24).
- “나는 … 각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깨달았노라”(전도서 3:12-13).
- "보라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며칠 동안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서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 좋고 마땅한 줄 내가 보았노니 이것이 그의 몫이니라"(전도서 5:18).
- "나는 기쁨을 찬양하노니 해 아래서 사람에게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음이니라"(전도서 8:15).
- “가서 기쁨으로 네 떡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시라”(전도서 9:7).
솔로몬이 왜 우리가 음식과 음료를 즐기라고 그렇게 주장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우리가 그가 주신 것을 즐기면 주는 자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선물을 열고 불평할 때 부모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선물을 열고 기뻐하는 것을 지켜보는 엄마와 아빠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감사하고 선물을 즐길 때 그분은 존중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기쁨을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기쁨이 만족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즐기는 데 바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선물을 원치 않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족하며, 만족에는 큰 이득이 있습니다.
우리가 청지기에 대한 우려를 놓쳤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와 즐거움은 우리가 몸을 청지기하는 방식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음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방향 감각 없이 이 가이드를 마치지 않도록, 시간을 내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몸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이 건강하고 좋은 식습관을 갖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무엇을 먹일지에 대해 생각하고 신경을 쓸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식단에 그런 생각과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몸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몸을 돌보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체육 트레이너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영양사도 아닙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먹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이스크림도 좋아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운동에 대한 동기 중 하나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이것이 다이어트와 운동에 대한 최선의 접근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언제 먹는지(가끔 간헐적 단식)와 얼마나 먹는지에 대한 제한(일반적인 분량 조절)을 실천합니다. 이런 간단한 것 외에도 저는 가공 식품과 설탕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더 주의 깊게 살피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원하신다면, 저는 제공할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고 가공이 덜한 음식을 먹도록 격려하는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는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음식 알레르기와 불내증이 얼마나 흔한지를 감안할 때, 모든 사람에게 맞는 단일 솔루션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을 관리하라는 부름은 우리 몸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식단을 주시함으로써 우리 몸의 성전을 지키라는 부름입니다.
섹스
성생활에서 하나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저는 여러분께 셰인 모리스가 쓴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현장 안내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 바울의 권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주를 위하여 있고 주께서도 몸을 위하여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주를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6:13-15).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 진실을 거부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적 부도덕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든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모든 창조물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성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는 성에 관한 혼란이 넘쳐납니다. 몸을 충실하게 관리하고 뒤틀린 세대에서 빛으로 빛나고 싶다면 성적 부도덕을 피하고 경건함을 추구하십시오. 결혼 밖에서 순결을 추구하고 결혼 안에서는 충실함을 추구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상류로 헤엄치는 것이 흐름에 따라가서 멸망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몸을 돌보고 상류로 헤엄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됩니다.
포르노를 끊고 멀리하라(마태복음 5:27-30)
몸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다(살전 4:3-8)
배우자에게 충실함(마태복음 5:27-32)
남의 배우자를 탐내지 말라(출20:17)
동성애적 충동과 활동을 부인함(롬 1:26-27)
부부의 침소를 존귀하게 지키라(히 13:4)
그것은 성적 충실성으로 가는 길의 대략적인 개요이며, 시작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기쁨과 쾌락을 빼앗길 것이라고 말하는 교활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부해야 할 거짓말입니다. 충실성의 길은 깨끗한 양심과 충만한 기쁨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몸을 관리하십시오. 당신의 몸은 그분의 것입니다.
토론 및 반성:
- 음식과의 관계를 설명하세요. 음식을 단순히 신체의 연료로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즐길 무언가로 생각하시나요? 음식에 대해 걱정하는 경향이 더 강하신가요, 아니면 식량에 대해 추측하는 경향이 더 강하신가요?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 당신의 삶에서 위의 성적 충실성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와 충돌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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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더 많은 관리 고려 사항
우리는 신체 관리의 몇 가지 큰 범주를 다루었지만, 주의를 기울일 만한 다른 고려 사항도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상기이고, 다른 하나는 경고입니다.
당신의 몸을 교회로 가져가세요
몸을 돌보는 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는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이 현장 안내서를 읽고 있다면 주님의 날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히브리서 저자에게 영감을 주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히려 권면하며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하자" (히브리서 10:24-25)고 쓰게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신자들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함께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모이는 행위는 일요일에 우리의 몸이 특정한 장소에 있어야지 다른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어딘가에 일요일 아침에는 교회에 갈 것인지, 다른 곳에 갈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라이브 스트리밍하고 설교를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은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제 교회에서는 회원들이 아플 때나 외출할 때 라이브 스트리밍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또한 설교를 게시하고 제공하는 팟캐스트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회원과 외부인을 위해 제공하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라이브 스트리밍이나 팟캐스트를 교회에서 다른 크리스천과 물리적으로 모이는 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볼 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라이브 스트리밍 예배는 확실히 격려적이고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이자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소비하는 상품으로 생각하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주 예수님을 그의 백성과 함께 섬기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모일 때, 우리는 다른 교인들이 노래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듣는 이점이 있고, 우리는 울부짖는 아기들의 놀라운 소리와 성경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설교되는 말씀을 듣고, 예배 전후에 하나님의 백성과 교제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온라인에서 복제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가세요.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현재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지금이 변화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여러분의 몸은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교회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는 것은 어떨까요?
휴대전화를 내려놓으세요
이 현장 가이드는 기술 관리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눈이 있고 지난 10년 동안 공공장소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스마트폰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의 기능은 놀랍고 절대적으로 좋은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휴대전화에 대한 집착은 마비시키고 비인간화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우선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동안 우리의 주의를 독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에 있다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물리적 존재에 대한 관리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콘텐츠가 있는데, 이는 우리의 시간과 집중력을 소모하여 우리의 온라인 "세계"가 우리의 신체가 있는 세계보다 더 현실적이고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포함한 모든 기술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절제를 추구하고자 합니다. 휴대전화는 놀라운 하인이 될 수 있지만, 얼마나 빨리 우리 삶에서 그 이상이 될 수 있는지.
하지만 어떨까요?
우리는 창세기 3장의 이쪽에 살고 있으며, 타락의 영향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의 몸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거나 충실한 청지기의 모습을 바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선하시며,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은 옳습니다. 그의 사랑의 섭리 밖에서는 어떠한 상처나 결함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가 주신 것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인내심이 많고 은혜로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우리 몸에서 죄의 영향을 느낍니다. 우리가 쇠퇴하고 죽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영향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 질병, 병, 암, 사고, 부상 등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창조된 질서의 일부이며, 인간의 타락은 우리의 도덕적 틀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틀도 꼬이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타락할 때 "창조물이 허무함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모든 창조물과 함께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롬 8:20, 23). 우리가 이 진흙 항아리를 관리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소망은 그들의 최종 회복에 있습니다.
토론 및 반성:
- 교회에서의 당신의 참여는 어떤 모습인가요? 참석은 당신에게 주어진 것인가요, 아니면 이 분야에서 성장할 수 있나요?
- 기술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기술을 적절한 위치에 유지할 수 있나요, 아니면 건강에 해로운 방식으로 삶을 침범하나요?
결론: 영원
당신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프를 연주하면서 구름 위에 떠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를 상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상상하십니까?
성경은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창조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회복되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진 육체적 존재로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면서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부활합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부활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고전 15:42-44)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주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중간 상태에서 우리는 일어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 밖에 서서 그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의 백성에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장에서 나중에 “나팔 소리가 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어야 하리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어떨 것인지 요약합니다(고전 15:52-53).
우리의 몸은 지금 우리가 관리하는 몸의 연장이지만 영광스러운 버전일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몸에서 죽을 것이고, 우리가 관리하고자 하는 이 썩을 수 있고, 불명예스럽고, 약하고, 자연스러운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력하고, 영적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관리해야 할 질병과 슬픔, 부상과 병, 결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식욕과 게으름에 빠지려는 유혹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육신을 입고 부활하신 주님의 면전에서 거할 것이다. 그때까지, 여러분의 몸으로 그분을 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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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 Damico는 루이빌에 있는 Kenwood Baptist Church의 예배 및 운영을 담당하는 목사입니다. 그는 다음의 공동 저자입니다. 시편을 성경으로 읽는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 출판물과 조직을 위해 글을 쓰고 편집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안나는 세 명의 놀라운 아이들을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