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 Mitchell L. Chase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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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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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그리스도인이 있는 이유는 신이 자비로우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의 지속적인 자비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문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고, 사람들이 집단을 지칭하거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해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일까요? 그 단어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요?

"기독교인"이라는 라벨은 원래 비기독교인이 사용한 단어였습니다. 제자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도행전 11:26에서 "제자들은 안티오크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의미하며, 제자들은 이 라벨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 단어의 의미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현장 안내서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1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첫째, 예수에 대해 믿는 바에 따라 식별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복음 16:15)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이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해 원하는 대로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이었다", "그저 훌륭한 선생님이었을 뿐이었다",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고대의 다른 예언자들처럼 예언자였다"고 말한다면, 이런 진술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 안에 순수한 기독교저자 CS 루이스는 예수가 단지 위대한 도덕 교사였을 뿐이라는 부족한 관념을 직설적으로 지적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람들이 종종 그에 대해 하는 정말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저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 교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지만, 그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유일한 말입니다. 그저 사람일 뿐이면서 예수가 한 말을 하는 사람은 위대한 도덕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자신을 삶은 달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은 수준) 아니면 지옥의 악마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면 미친 사람이거나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를 바보로 몰아붙이거나, 그에게 침을 뱉고 악마로 죽일 수도 있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를 주님이자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가 위대한 인간 교사라는 은근한 헛소리는 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을 열어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매우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네 복음서는 그들의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1에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누가복음 1-2에서 예수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신성한 잉태된 아들입니다. 요한복음 1에서 그는 영원한 말씀, 즉 성육신하신 분입니다. 

독자들이 4복음서를 탐구할 때, 그들은 모든 것이 창조된 분과 모든 것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성하셨고,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언어를 제공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간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진 한 분입니다. 

4세기에 쓰여진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요약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세상보다 먼저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나셨지 만들어지지 아니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성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신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에서 성장해야 하며, 이는 그리스도론으로 알려진 교리에 대한 성찰을 의미합니다. 오랜 기독교 신조 전통에 의해 뒷받침되는 성경 연구는 우리가 예수의 한 인격과 두 본성을 확증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우리는 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만 알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적절한 기독교 고백은 예수의 타협 없는 신성과 진정한 인간성을 인정할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주권을 고백합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계 19:16). 우리는 그의 전적인 주권(마 28:18), 그의 의로운 심판(요 5:22), 그의 고귀한 통치(빌 2:9),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골 2:3)를 고백합니다. 성령의 조명하는 역사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님이시다"(고전 12:3)고 고백합니다. 

구원에 관하여

반성하는 것 외에도 사람 그리스도의 경우, 우리는 다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일하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우리의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두 기둥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자의 성육신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이 동정녀적 잉태가 예수의 죄 없는 인간성을 보장했다고 믿습니다. 예수는 자라면서 유혹을 받았지만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히브리서 4:15). 4복음서는 예수가 병자를 고치고, 악마를 정복하고, 지상 사명을 완수한 지상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사명의 절정은 십자가의 사역이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고후 5:21).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습니다(롬 3:25).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삯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충실한 대속자, 죄를 지고 정의를 만족시키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사역은 모든 것이 탈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역에서 모든 것이 그 지점, 예루살렘 성 밖의 그 지점으로 이끌렸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약속된 왕이자 구원자인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눌렸고,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왔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돌이켰으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느니라”(사 53:5-6). 

십자가를 통해 주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는 자신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히 8:6-12). 이 새 언약에는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승리는 입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이 입증은 죽음에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아들은 영광스러운 인성으로 부활하셨고, 죽을 수 없는 몸, 영광과 불멸의 구체화된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고백하고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18-25). 우리는 십자가를 전파하고, 십자가를 기뻐하며,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절정에서 승리한 것을 약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와 수치를 지고 대속의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를 감안할 때, 그는 우리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주장은 배타적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나 영생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이것을 전파했고 베드로도 청중들에게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천하 사람들 중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 아니하였음이니라"(행 4:12)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와 빈 무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위해 주신 분에 대한 철갑 같은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사십 일 후에 그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습니다(행 1:9-11; 히 1:3). 그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원수들을 정복하시고 영광스러운 재림을 준비하십니다(마 25:31-46; 고린도전서 15:25-28).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을 고백하고 그가 행한 일의 경이로움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니케아 신조와 함께 예수가 "사람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가시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신앙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추상적인 의미로만 믿지 않습니다. 피난처로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에 대한 신뢰의 응답이며, 빈 손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시는 모든 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사람들이고, 우리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의 주장, 그의 행위, 그의 승리, 그의 권능, 그의 약속, 그의 언약을 신뢰합니다. 성경적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행위, 즉 순종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일 참된 믿음의. 믿음은 의존이며, 구세주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약속함으로써 독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다. 그러한 믿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데, 바울이 에베소서 2:8-9에서 묘사한 바와 같다. "너희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단순한 결정, 의지의 행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올바르게 인식할 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성령의 선행 역사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반응을 "끌리는" 관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6:44)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6:65)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거듭나게 할 때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그러나 그를 영접한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이나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거듭나게 하시는 자비로운 사역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회개에 관하여

종종 함께 언급되는 단어 두 가지는 "믿음"과 "회개"입니다. 첫 번째에 대해 생각해 본 후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전파하실 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15).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한 후, 청중들은 마음이 찔려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사도행전 2:38). 

믿음이 전환에 관한 것이라면 에게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이자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짓 우상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의 방식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는 서로 관련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받은 환대와 여러분이 우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 스스로 보고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9). 

회심은 즉각적인 도덕적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해서 죄의 올가미와 거짓말에 직면할 것이고, 따라서 회개는 단 한 번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의 95개 논제 중 첫 번째에서 이 아이디어를 포착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태복음 4:17)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믿는 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자들은 믿음과 회개를 모두 견뎌냅니다.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죄에서 돌아섭니다.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시대의 우상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회개는 회심 시뿐만 아니라 제자로서의 삶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0:9에서 말했듯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네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토론 및 반성:

  1. 예수님, 구원, 믿음, 회개에 대한 지식을 키우는 데 필요한 방법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성장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 위의 각 주제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적어보고 이러한 진실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3. 당신은 기독교 진리의 다른 어떤 분야를 탐구하고 싶습니까?

2부: 당신의 구원에 대한 그림들

예수, 구원, 믿음, 회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고 믿는 것 외에도,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묘사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상상력을 위한 그림인 그러한 묘사를 많이 제공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현실을 생각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섯 가지 그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신의 자비로 인해 우리의 영적 입장은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는 영적 어둠에 속했지만,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빛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영적 영역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둠의 영역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고 썼습니다(골 1:13).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살전 5:5). 어둠은 불신과 불순종의 영역입니다. 영적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벧전 2:9). 빛을 구원의 영역으로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데려온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빛”은 우리의 영구적인 영역입니다. 우리는 영역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영적으로 이식했습니다. 어둠은 우리의 과거였지만 빛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영적 어둠은 영적 죽음의 영역입니다. 회개하기 전에 죄인들은 영적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죄 속에서 죽었습니다. 

죄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묘사한 영적인 상태에 거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전에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행하던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느니라"(엡 2:1-2). 이 영적 죽음은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입니다. 

영적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적 생명이며,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증은 에베소서 2:4-5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풍부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우리가 허물로 죽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느니라.”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을 자신 안에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6:35). 그리고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 (요한복음 6:58). 구원은 당신이 더 이상 영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 

노예에서 자유로

영적인 어둠과 죽음의 영역에서 죄인들은 묶여 있습니다. 죄에 대한 노예 상태가 있어서 우리 문제의 심각성과 범법의 억압을 확증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사악함에 헌신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중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적대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우리는 속박에서 영적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구원을 바로 그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없어져서 우리가 다시는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함을 아노라 죽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느니라” (롬 6:6-7)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탈출에 의해 형성된 사람들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포로 상태를 극복하고 그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 구약 성경의 틀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구원을 형성합니다. 죄에 사로잡혔던 우리는 주 예수님에 의해 해방됩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롬 6:18). 

죄는 한때 우리의 주인이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력한 권능과 풍성한 자비로 우리를 포로 상태에서 끌어내어 그의 빛과 생명의 자유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셨느니라”(롬 8:2). 

정죄에서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가 영적 죽음과 속박의 어둠 속에 살았을 때, 우리는 정죄,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의 은혜로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정당화는 죄인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정당화가 아닌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급진적인 좋은 소식은 죄인에게 용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는 우리가 옳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 우리의 피난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칭의하십니다. 어떤 죄인도 자신의 행위, 자신의 노력 또는 개선으로 칭의될 수 없습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한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로마서 4:3에서 바울은 창세기 15:6을 인용하고, 로마서 4:7-8에서 시편 32:1-2를 인용하여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의롭게 하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 계산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리하게 계산되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의로운 지위"를 계산하십니다. 

적대감에서 우정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게 된 자들로서,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의 원수가 아닙니다. 복음의 화해시키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그의 친구로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롬 5:8)고 썼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화해시키기 전에는 우리가 그의 "원수"(롬 5:10)였다고 썼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새로워지고 우리의 눈이 열렸기 때문에, 우리는 화해되지 않은 관계의 적대감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우정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사 41:8).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용서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그의 축복과 은총에서 멀어지게 한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위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니라"(벧전 3:18). 이제 하나님께로 인도되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교제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요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라" (요한복음 15:15). 

토론 및 반성:

  1. 위의 당신의 구원에 대한 사진 중에 당신의 경험을 특히 잘 설명하는 사진이 있나요? 간증을 나눌 때, 이런 성경적 이미지를 활용하시나요?
  2. 이 찬란한 그림들이 묘사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제3부: 믿음의 열매

구원에 대한 이전의 그림을 떠올려보면, 빛의 영역은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 어둠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자비로운 일은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지만, 제자의 삶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그리스도—가 “빛 안에 계신 것같이 빛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요일 1:7). 빛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순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하도록 가르침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억에 남는 말씀으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을 포함하며, 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내용에는 그리스도의 명령, 즉 지켜야 할(순종해야 할) 명령이 포함됩니다. 순종은 모든 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권위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합합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8:18).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걸쳐 있는 이 권위의 범위를 감안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그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할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순종하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9-20에 따르면, 제자를 만드는 일의 일부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삶에 대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배울까요? 우리는 지시와 모방을 통해 배웁니다. 

지시와 모방 

제자는 배우는 자이며, 배우는 자는 교훈을 중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의 학습 여정은 평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으로 가득 찬 지역 교회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지혜롭게 걷는 신자들과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들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주제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교리라고 합니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모든 교리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리와 같은 처리해야 할 주요 교리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 통치와 의식의 집행과 같은 2차적인 문제로 우리를 인도하는 다른 교리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천년왕국이나 지구의 나이에 대한 견해와 같이 3차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배우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우리의 학습은 뇌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적용하는 것은 필요한데, 그러한 적용이 지혜로운 삶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평생 동안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공식적인 교육 외에도 우리 주변의 경건한 신자들의 모범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집니다. 그리고 잡혔다. 빛 속에서 걷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삶을 공유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말을 사용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제자들은 불완전한 제자이지만, 모범과 모방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 부르시고, 그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가르침과 모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따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8:34)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포함하며, 죄에서 돌아서는 것은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죄악적인 욕망은 충족을 갈구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자기 부인은 우리의 불명예스러운 욕망에 따라 걷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을 따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고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라는 용어는 처형의 이미지입니다. 현대에 십자가는 보석으로 착용되고 벽에 장식으로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잔혹함을 생각해보세요. 십자가는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34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을 통한 생명으로의 부름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는 십자가 모양의 길을 걷는다. 그것은 값비싼 제자도의 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바뀌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할지니 그러므로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여 그 정욕에 순종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롬 6:11-12)고 썼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죄에 대해 죽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이 십자가를 거쳐 부활의 삶으로 이어진 것처럼, 제자의 길은 죽음을 통한 삶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진정한 삶인 삶입니다. 

작품의 중요성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우리는 순종하라는 성경의 부르심을 분명히 가르쳐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영적 삶의 부족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기록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의 죽음에서 영적으로 부활했으며, 지금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습니다(엡 2:4-6).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는데,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설명하듯이, "몸이 영 없이 죽은 것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이 죽은 것이니라"(야고보 2:26). 선행은 참된 믿음의 기초가 아니지만, 참된 믿음의 실체를 확증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주장하지만 그에게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도 요한의 경고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어둠 속을 행하면서 그와 사귐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요일 1:6)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요일 2:4)라고 말합니다. 요한 1서의 이 구절들은 믿는 사람들이 확신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강박적인 자기중심주의자가 되도록 인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은 빛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빛 안에서 행할 것이라고 부끄러움 없이 가르칩니다. 

타오르는 불꽃을 내뿜는 화덕에 다가가면 그 불꽃이 연기와 열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에게 "이게 연기와 열을 내는 불인가요, 아니면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불인가요?"라고 묻는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질문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진짜 불은 진짜 열과 진짜 연기를 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된 신자는 순종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할 때,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불과 열과 유사한 관계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꽃이 열을 생산하는 것처럼 참된 믿음은 행위를 생산합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을 거역하며 산다면, 성경 저자들은 그 사람에게 그 믿음의 고백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촉구합니다. 

성령의 열매

죄에 대한 싸움은 영적 삶의 표시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욕망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갈 5:17). 신자는 경쟁하는 욕망의 존재를 분별합니다. 죄의 유혹이 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거룩함을 추구하고 죄에 맞서 싸우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과정은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같이 성장하는 것이며, 이 성장은 진정한 구원의 결과입니다. 구원의 뿌리는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갈라디아서 5:22-23). 이러한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와 연합된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특성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요한복음 15:4-5).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분 안에 거하라”고 부르셨으므로, 우리는 그 명령을 순종해야 할 무언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5:9-10). 그러므로 거하는 것은 순종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분이 빛 안에 계시듯이 빛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로서,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그러한 삶의 표징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어하며, 그것은 순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제자로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그림을 제공합니다: 빛 안에서 걷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옷 갈아입기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옛 삶은 우리가 벗어야 할 옷과 같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삶은 우리가 입어야 할 것입니다. 벗고 입는 것 - 이것들은 거룩함, 거룩한 삶의 그림입니다.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 이는 옛 행실을 따라 속이는 정욕으로 썩어가는 것이니라”(엡 4:22)고 말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4:24)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 탄생에 상응하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삶을 장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BE 우리는 지금 누구인가 ~이다

골로새인들에게 바울은 “너희는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그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골 3:9-10). 다시 한번 우리는 벗어버리는 옷과 지금 입어야 할 옷처럼 벗어버리는 것과 입는 것의 이미지를 봅니다. 

바울은 새 자아를 입는 것이 무엇을 포함하는지에 대해 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자비로운 마음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입으라. 서로 용납하고 누가 누구에게 원망할 일이 있거든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묶어 주는 것이다”(골 3:12-14)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경건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새 삶에 상응하는 삶의 방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건 정말 중요한 문구예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생명을 가지고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이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그의 구원의 사역은 우리의 회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한 다음 스스로 우리를 내쫓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마태복음 28:20).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의 인격과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에 더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그 개념과 언어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장사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습니다(6:4). 그리고 우리가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그와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6:5).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모든 것이 이 은혜로운 현실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는 지혜와 거룩함에서 자랄 수 있고, 육신에 맞서 싸우고 죄에서 돌이킬 수 있으며, 진리를 위해 용감하게 서고 순교자의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이 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새로운 언약의 마련은 우리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나 미래의 어떤 것도,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빌 1:6).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분이 미래에 그 판결을 훼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롬 8:33-34).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으로의 육체적 부활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롬 8:18-25). 

토론 및 반성:

  1. 위의 내용 중 어느 부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2. 한 섹션에서는 기독교 생활에서 모방의 가치를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경건한 삶의 좋은 본보기가 몇 명 있나요? 

4부: 은혜의 수단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려는 우리의 추구에서 주님은 신학자들이 "은혜의 수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은혜의 수단은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고, 강화하고, 지탱하고, 격려하는 실행입니다. 역사상 성도들의 글과 간증에서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기도, 의식의 실행입니다. 

경전

하나님은 그의 말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특별한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말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읽고 연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큰 이야기를 알게 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시편 1:1-3; 19:7-11). 

그리스도인은 ESV나 CSB 또는 NASB와 같은 읽기 쉽고 정확한 하나님 말씀 번역본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무작위로 펼쳐서 읽는 게임을 하는 것보다,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갖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성경에서 한 권을 골라 여러 차례에 걸쳐 읽습니다. 새로 믿는 사람은 특히 마가복음, 잠언, 에베소서 또는 창세기를 읽는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천은 성경을 사려 깊고 소화하기 쉽게 읽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천히, 큰 소리로, 그리고 구절을 여러 번 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어떤 주제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지 생각해 보세요. 좋은 스터디 바이블이나 접근하기 쉬운 성경 주석에서 가져온 스터디 노트를 사용하면 읽은 내용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함께 일기를 쓰는 것을 고려해 보세요. 구절에 대한 생각이나 질문을 적어 보세요. 본문에서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떤 진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개인적인 성경 읽기 외에도 우리는 회중 예배에서 하나님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듣는 것은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적인 포옹은 우리가 스스로 분별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개인적인 오류와 이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최초의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의 해석적 지혜와 우리보다 앞서 간 증인들의 구름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

기도의 훈련은 창세기 4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 저자는 "그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4:26).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에 대한 의존으로 특징지어지며, 의존은 기도를 통해 표현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모순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전서 5:17)고 말했을 때, 그는 그들이 삶을 형성하는 기도의 태도와 실천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은밀히”(마태복음 6:6) 기도하도록 격려하셨는데, 이 실천은 종교인들이 존경을 위해 자신의 헌신을 보이는 경향을 약화시켰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예수님은 공동 기도를 금하지 않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6:5-8).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고 의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 힘, 축복, 정의, 지혜와 같은 것들을 주님께 간구합니다. 시편은 기도가 절망, 희망, 기쁨, 슬픔, 혼란, 좌절, 축하, 절망을 포함한 삶의 모든 감정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기도의 훈련은 성경 읽기와 함께 하면 좋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은 우리의 헌신의 시간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함께 하지 않고는 성경을 읽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이해와 기쁨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와 도움을 위해 기도하세요. 성경 구절의 말씀이 기도를 위한 특정 단어나 구절을 제공하고 기도를 위한 특정 주제를 촉발하도록 하세요. 

기도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주님께로 마음을 집중시키는 다른 것들을 우선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감안할 때, 우리는 기도의 긴박함과 중요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악한 날에 하나님과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준비되기를 원하며, 그것은 영적 전투를 위한 영적 갑옷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6:14-17에서 영적 갑옷을 나열한 후, 그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이를 위하여 모든 인내로 깨어 있고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라”(6:18)고 말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도의 빈도에 주목하세요: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로서의 특권과 책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중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관행을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6:18)이라고 부릅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의 훈련은 우리의 영혼에 영적으로 유익하므로, 원수는 이러한 관행을 멸시합니다. 은혜의 수단이 영적인 활력과 영양의 수단임을 아는 제자가 됩시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뻐하고 즐깁니다. 

조례 

신약의 두 의식은 세례와 주의 만찬입니다. 두 의식 모두 지역 교회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18-20에서 세례 의식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복음 28:19)고 하십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새 언약의 표징이며(렘 31:31-34; 마가복음 1:8 참조), 따라서 믿음으로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례 물에 잠기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여주는 그림(롬 6:3-4)이며, 주님의 복음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후 순종하는 단계입니다(마 28:19). 하나님의 모인 사람들 앞에서 신앙 고백을 공개적으로 했을 때 세례를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례를 받는 것은 영혼을 강화하고 세례를 목격하는 것은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실제로 세례 의식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은혜의 수단입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또 다른 의식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날 밤, 그는 빵에 대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누가복음 22: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잔에 대해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부어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 (22: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 지시를 반복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이 의식의 중요성을 확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6).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친교 또는 성찬례라고도 함)은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 예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십자가의 능력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제자들은 새 언약,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그의 대속 사역을 회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묵상할 때, 성령은 기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강화합니다. 

성경의 공동체적 가르침, 기도의 실천, 그리고 의식의 집행을 통해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속해야 합니다. 

토론 및 반성:

  1. 당신의 독서와 기도 습관은 어떤가요? 당신이 이런 은혜의 습관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2. 멘토는 어떻게 당신이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도록 도전하고 책임을 묻습니까? 
  3. 위의 자료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어떻게 풍부하게 해줍니까?

5부: 국민에 속함

성경 저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분리된 순종적이고 번영하는 제자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하며, 그래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구속받은 신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그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죽으셨습니다(엡 5:25). 그는 "교회의 머리요 그의 몸이시며 그 자신이 그 구원자이십니다"(엡 5:23). 하나님의 백성은 주 예수님의 신부이자 몸이며, 그는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그의 백성과 언약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에서 한 백성을 구속하셨습니다(계 5:9). 

예수의 사람들의 단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주변 문화가 매우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종에는 단체적 현실이 포함되며, 개인적인 현실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그 지체입니다"(고전 12:27)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몸에 여러 부분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도 지역 몸에 합류하고, 봉사하고, 교화하기 위해 공언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초기 교회는 주님의 날에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재물에서 기부하고, 의식을 집행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지역 신자 공동체와 교류할 책임과 특권이 있습니다. 동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람들입니다(고전 8:11).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에 무관심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특정한 성향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 성향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원 어나더스

성경 저자들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라고 지시한 것을 따르기 위해, 그러한 순종의 맥락으로서 고백하는 신자들의 지역적 단체와의 가정된 연결이 있습니다. 로마서가 도착했을 때, 그것은 교회에서 읽혔습니다. 빌립보서가 보내졌을 때, 그것은 교회에서 받았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서 두 권이 읽혔을 때, 그것은 교회에서 읽혔습니다.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독자들에게 보냈을 때, 그는 그것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보냈습니다. 

신약성서 서신은 복음을 고백한 지역 교회 공동체의 존재와 중요성을 전제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모였던 이 교회들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서 온 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함께 예배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예배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예배했습니다. 젊은이와 노인은 함께 예배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열매를 그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참아주고(엡 4:2), 서로에게 진리를 노래하고(엡 5:19), 서로 용서하고(골 3:13),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고(골 3:16), 서로를 돌보고(고전 12:25), 서로 섬기고(갈 5:13), 서로에게 후대하고(벧전 4:9), 서로 사랑하라고(벧전 4:8) 촉구했습니다. 이 “서로”라는 구절들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위해 지역 교회가 활력적임을 인식할 때에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함

누군가가 "나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지만, 교회는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성경이 함께 묶어 놓은 것을 분리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할 권한이 없습니다. 요한 1서로 알려진 편지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권고가 장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다음 예를 고려해 보세요. 

요한일서 1:7에서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교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빛 안에 거하는 표시입니다(요한일서 2:9-11).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의 부족은 영적 죽음의 표시입니다(요한일서 3:10). 요한일서 3:11에서 독자들이 알아야 할 오랜 메시지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모범은 우리의 사랑을 희생적인 방식으로 형성해야 하며, "우리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요한일서 3:16).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듭니다. 종종 시간, 인내, 투자, 자원이 필요합니다. 편의성, 효율성, 자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성경적 사랑은 반문화적입니다. 그리고 지역 교회에 속하고 사랑하는 것은 반문화적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추론은 직설적이고 명확합니다.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동료 그리스도인을 멸시한다면 그 주장은 공허합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성경 저자의 추론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중요한 것에 우리의 삶을 맞추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복음을 세상에 전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보물을 가진 사람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을 그들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고후 4:6-7). 우리는 영광스러운 보물을 담은 진흙 항아리입니다. 주님은 그의 진흙 그릇들에게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선포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마 28:19-20; 벧전 2:9). 지역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 더 큰 사명에 대한 헌신입니다. 

성경으로 가득 차고 말씀 중심적인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복음을 듣고(설교, 가르침, 기도를 통해), 복음을 부르고(교리적으로 건전한 예배 노래 가사를 통해), 복음을 봅니다(세례와 성만찬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 보물을 숨기기 위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고, 그것 안에서 기뻐하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소유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번성하고 민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지역 교회가 필요합니다. 

사회적 망상과 혼란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고, 붙잡습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보물은 창세기 3장의 세상의 어둠에 맞서 밝게 빛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빛입니다(마태복음 5:14; 요한복음 8:12).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위해 싸울 책임이 있습니다(유다서 3절).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관리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로 더 전함으로써 충실하게 관리합니다. 

복음의 보물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고, 그것은 우리보다 오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가 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의 목적에 동참하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토론 및 반성:

  1. 교회에서의 당신의 참여에 대해 설명하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할 방법을 찾고 있나요? 
  2. 교회를 건강에 해로운 방식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교회를 단순히 참석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쉽습니다. 위의 자료는 우리가 교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나요?
  3. 교회에서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도울 수 있는 짐이 있나요? 

결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양한 진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용서받고 새롭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의 승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혜로 이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믿음과 회개의 리듬에 따라 걷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그의 교회에 합류하고, 그의 영으로 위임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죽은 마음에 역사하고 빛 속에서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며, 그의 영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으로 이끄는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그를 통해 우리는 죄에 죽고 죄의 권세와 통치에서 부활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바울이 기억에 남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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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 체이스 루이빌에 있는 코스모스데일 침례교회의 설교 목사이며,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성경학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영광이 부족함 그리고 부활의 소망과 죽음의 죽음그는 "성경 신학"이라는 제목의 Substack에 정기적으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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